강화도 歷史 文化

역사의 고장 강화도 유적지 둘러보기

강화도농부 2011. 5. 23. 16:56

역사의 고장 강화도 유적지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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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천대(기념물 제18호)
                봉천대는 고려시대에 축리소로서 제천의식을 행하던 제단이다.
                조선 중엽에는 이곳을 봉화대로 사용하여 나라의 주요한 통신 수단의 역할을 수행했다.

                봉천대의 높이는 5.5m, 밑변의 길이는 7.2m의 정방향 사다리 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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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곶돈대 (사적 제306호)
                갑곶돈대는 고려가 고종19년(1232)부터 원종11년(1270)까지 도읍을 강화도에 옮겨 몽고와 줄기차게

                싸울 때의 외성으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조선 인조 22년(1644) 강화의 여러 진이 설치될 때 제물진(갑곶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7일 병인양요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과 문수산성 등을 점령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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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종외가(문화재 자료 제8호)

                 조선 철종 4년(1853)에 지어진 것으로 철종 임금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았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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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진진(사적 제226호)

                조선 숙종5년(1679)에 축조된 덕진돈대, 남장포대, 덕진포대가 이 진에 소속되어 있었다.

                고종3년(1866) 병인양요시 프랑스 극동함대와 고종 8년(1871) 신미양요시 미국의 아세아함대와

                치열한 격전을 벌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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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고비(향토유적 제9호)

                              덕진진 남단 덕전돈대 앞에 위치한 이 비는 조선 고종4년(1867) 대원군의 명에 의하여

                              강화 덕진첨사가 건립하였다. 개화여명기에 외국선박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어떠한 외국 선박도 함부로 이 해협을 통과할 수 없다는『해문방수타국선신물관』이라는

                              글로 음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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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성보(사적 제227호)
                사적 제 227호, 광성보는 조선 효종 9년(1658)에 설치 되었으며, 숙종5년(1679)에 축조 되었다.
                영조 21년(1745)성을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하고 按海樓란 현판을 달았다.
                고종3년(1866) 프랑스의 극동함대와 치열한 격전(병인양요)를 치루었으며, 고종 8년(1871) 미국의

                아세아함대(신미양요)가 이 성을 유린하여 우리 수비군은 탄환 및 화살이 떨어지자 어재연 장군 이하

                전장병이 백병전으로 맞서 용감히 싸우다 전원이 장렬히 순국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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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지돈대(유형문화재 제33호)
                길상면 해안가에 있는 택지돈대는 조선 숙종5년(1679) 축조된 정방형의 돈대이다.
                돈대 내에는 4개의 포좌가 설치되어 있으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돈대를 훼손하면

                화를 입는다는 전설이 있어 부락수호를 위해 신단처럼 보호되어 현재까지 그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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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오돈대(유형문화재 제36호)
                강화도 최남단 화도면에 위치한 돈대로 조망범위가 매우 넓으며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반달형으로 숙종 5년(1679)년 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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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도 갯벌과 해수욕장
강화도 서쪽에 있는 주문도는 과거 중국과 교역이 있었을 때 중간 기항지로서 중국 사신과 상인 등을

영접하던 곳이라 대빈창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길이 1.5km, 폭 80m로 되어있고, 크기가 1.5km인 솔밭이 있다.
또 2Km에 달하는 섬을 둘러싸고 있는 자갈과 모래가 섞여있는 백사장과,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등사

마니산에서 남쪽으로 자락을 이어온 정족산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때 아도화상이 신라로 가는 길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유서깊은 고찰이다.
전등사를 감싸고 있는 정족산성 안에 궁궐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한때는 고려 왕궁의

원찰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의 가람은 고려 충렬왕때를 기원으로 보는 경향이 높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충렬왕 8년(1282) 왕의 원비인 정화궁주 왕씨가 송나라에서대장경을

가져오게 하여 이 곳에 보관했으며, 이와 함께 불전에 옥으로 된 등잔을 올린 뒤

사찰의 이름을 전등사로 했다는 기록이 가장 신빙성있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강화도 석모도 보문사
인천광역시 강화군(江華郡) 삼산면(三山面) 매음리(煤音里) 낙가산(洛迦山) 서쪽 중턱에 있는 절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본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며, 한국 3대 관음영지(觀音靈地) 중의 한 곳이며,

635년(선덕여왕 4) 한 어부가 바다에서 건진 22개의 불상을 낙가산에 모시면서 창건되었다는 연기(緣起)가 전한다.

보문사 석실

그 뒤 고려 초기에 회정(懷正)이 22존 중 삼존불과 18나한은 굴 속에 모시고

송자관음은 따로 관음전을 지어 봉안한 뒤에 절을 낙가산 보문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절의 역사는 조선 후기부터의 것만 전해지고 있다. 

                                

    

                                                                                     마애석불

석불좌상은 1921년 조각된 것으로 높이 9.2m, 너비 3.3m 이다.

                        이 석불과 석굴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찾는 여인들이 많다.

이 밖에 절에는 보문사마애석불좌상(시동유형문화재 제29호)과 천인대(千人臺)가 있고,

마애석불좌상의 상부에는 거대한 눈썹바위가 있다. 
                                                 
                                                          

                                                           보문사 전경 
                        1812년(순조 12)에 중건한 뒤로 수차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법당·관음전·대방(大房)·종각·석실 등이 있는데,

                        이 중 보문사석실은 시도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인대는 길이 40m, 너비 5m의 설법하는 장소로도 쓰이는데 1.000명이 앉을 수 있다해서

                        천인대라 부르고 있다.

 

 

 


    강화 동막 해수욕장
함허동천 입구에서 오른쪽 해변길을 따라 가면 바로 갯벌을 만나게 된다.

아마존,지중해,일본해와 더불어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갯벌이 보일때쯤 작은 언덕이 나오고 언덕을 돌아나가면 갑자기 시야가 탁트이며,

솔숲에 감겨있는 백사장을 만난다. 강화의 유일한 해수욕장인 동막해수욕장이다.

이른 오전과 늦은 오후에는 해수욕을 즐길 수 있고, 한낮에는 갯벌에서 작은 갯것들을 잡는 재미도 솔솔하다.
갯벌 속에서 뛰고 노는 일도 색다른 경험이 된다.

해수욕장에는 아주 잘 가꾸어진 소나무 숲이 갖추어져 있다.

때때로 삼겹살에 찌개를 끓이는 가족들이 눈에 띄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 시원함만큼은 최고다.

해수욕장 앞에는 '바다가 있는 풍경'이라는 분위기 있는 전원카페도 있어 젊은이들의 데이트를 즐겁게 한다.

해수욕장 왼쪽 언덕에는 분오리 돈대가 있다.
예전에는 중대 규모의 군사들이 대포를 앞세우고 강화를 지켰던 중요한 곳이다.

둥글게 돌로 쌓아둔 돈대에 서면 해수욕장과 갯벌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한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풍경은 강화 여행의 백미로 꼽힌다.

 

              

        함허동천야영장

                                                                                          

마니산 기슭에 위치한 함허동천은 마니산줄기 동쪽으로 뻗어내린 능선
     에 위치한 서울근교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시범야영장으로 경치와 산
       세가 빼어나고 수도권 제1의 관광휴양지로 작은 규모의 계곡이 제법
          운치있게 형성되어 있다.  

                                                      

     함허동천 계곡

          마니산입구에서 등산을 시작하여 정상의 참성단을 거쳐 함허동천으로
          내려오는 등산로와 첨성단에서 신라 선덕여왕 8년에 희정대사가 창건
          하고 세종8년에 함허대사가 보수하였다는 정수사(보물 161호)로 내려
          오는 두개의 등산로가 있는데 모두 경치가 빼어나 평일은 물론 공휴일
          , 피서철, 단풍철 항시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등산로이다.
         


     함허동천 야영장

  함허동천 시범야영장은 12만 7천평의 드넓은 면적에 1일 입장객 4,000 명의 동시 수용이 가능하며

                                   소형(4인기준)텐트는 1,000개까지 칠 수 있다.                                                                    

주요 시설물로는 관리사무소, 매표소, 전망대, 청소년수련장이 각각 1개소에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놀이마당 2개소가 있어 단체별 야유회활동을 할수 있으며 편익시설로는 고정평상 69개, 이동평상 47개,
       의자 123개를 설치하여 쉬며 즐길수 있는 쉼터를 제공 이용객 편의를 도모하고

주차장시설로는 3개소에,승용차 200대를 주차능력을 갖추고 있다.   

      또한 주변에는 먹거리인 도토리묵과 활어회, 삼계탕, 매운탕을 주로 하는 식당과 관광객이 쉴 수 있는

                              민박집 20여개가 있어 등산 후 식사는 물론 민박으로 여장을 풀 수 있다.                             


 

함허동천 인공폭포


 


                                                                         강화역사관

강화군은 선사시대의 유물인 지석묘를 비롯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려시대의 팔만대장경 및 금속활자, 고려자기등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고려의 유적지 이다.

  
이후 조선시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시 인조 임금의 피난 수도 이기도 했으며 조선말기에는 대원군의 쇄국정치와 천주교의 탄압으로 빚어진 프랑스 함대의 침입 사건인 병인양요, 신미양요 그 후 운양호사건 으로 강화도조약 체결등 풍운을 겪어낸 역사의 산실로 강화도 전역에 14개의 대소 사찰과 97점의 문화재를 간직한 역사의 고장입니다.

  
국난을 극복한 강인한 민족의 저력과 슬기로운 문화를 계승시켜 민족항쟁의 위업을 선양하고 호국정신의 함양을 위하여 1984년부터 5개년 사업으로 16억 7천만원을 투입하여 1988년 9월 14일 강화역사관을 개관하였습니다. 역사의 고도이며 개국의 성역인 강화도의 문화유산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입니다.

강화터미널에서 역사관까지 약 2km정도 거리다. 터미널에서 내린 다음 영등포행 완행버스로 다섯 정거장 정도 가다가 구 지도소 앞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어가면된다. 자동차를 가지고 올 경우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바로 왼쪽으로 난 길로 들어가면 강화역사관 이정표가 보인다. 주차하기에는 비교적 넉넉한 공간이 있다.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검문소가 있다.  이 곳에서 좌회전하여 조금 내려 오면 강화도의 역사를 한곳에서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한옥형식으로 된  강화역사관과 몽고와의 줄기찬 항전과 병인양요, 신미 양요 등 수도의 관문인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 역할을 하던 갑곶돈대와 홍이포, 천연기념물 제 78호인 탱자나무 그리고 이섭정, 비석군, 금속활자 기념비, 시선배등이 관내에 있어 동시에 관람을 할 수 있다.

2층건물 4개의 전시실에는 강화도 전쟁사에 관한 자료와 화문석도자기등 볼거리도 다양하며 특히 강화산성의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려주던 강화동종은 더 이상 타종이 불가능할 만큼 많이 상해서 이 곳 역사관 안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어 안타깝지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어 종의 세심한 부분까지 살펴 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전시된 도자기 중에는 강화도에서 출토된 국보 133호 "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  복제품이 있다.




                                                                         갑곶진홍이포

 

 

 

 

 

                                                                             교동읍성


강화도 교동섬

교동의 원래 이름은 대운도, 고림, 달은 신이라 하였고 고구려때 처음으로 현(縣)을 두어 고목근현이라 했다.

신라 경덕왕때 교동현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교동은 동서가 18km, 면적은 8km, 주위가 37.5km, 면적은 47.15㎢ 의 삼각주형의 땅이다. 인구는 3,820명이다.

교동의 역사유적으로는 교동향교(고려때1286년 안향선생이 원나라에서 공사상을 들여와 이곳에 봉안하여 우리 나라에 주자학을 성행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지금도 음력 1일 15일에 분향제를 올린다.)

화개사(고려때 창건. 고려말 목은 이색이 글을 읽었던 곳이기도 하다) 연산군 유배 유적지(중종 반정때 연산군이 유배되어 있다가 병사한 곳이다.

                                             

 

 

                                                                             초지진

             초지진은 강화외성 최남단에 자리한 진으로 해상으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다.

 

 

 초지진대포

             고종 3년(1866)에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함대와 공방전이 있었고(병인양요),

             고종8년(1871) 에는 통상을 강요하며 내침한 미국 로저스의 아세아 함대와(신미양요) 그리고

             1875년 침공한 일본군함 운양호를 맞아 치열한 전투(강화도조약)가 있었던 곳이다.


 

 

 

고려궁지

                                     
고려지는 지금으로부터 760여년전 몽고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당시 임금님이 거쳐하시던 궁궐로 이곳에서 약 39년간(1232~1270) 몽고에 항쟁했다.                     

강화로 천도해온 고종은 약 2년에 걸쳐 연경궁을 본궁으로 궁궐과 관아를 지어 건물의 명칭을 전부

 개성의 궁궐과 똑같이 하고 궁궐 뒷산도 송악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궁궐은 몽고와의 화친에 따라 허물었으며 현재 궁지 내에는 강화지역을 다스렸던 유수부가 있다.

                또한 고려궁지 내에는 외규장각이 있었으며 병인양요때 프랑스군들이 이곳에 있던 많은 서적들과

                은궤, 지도 등을 약탈해 갔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고서들도 이곳에서 약탈해간 것입니다.


                이 궁전은 건립한지 400년만에 조선조 행궁이며 유수부를 세?으니 그동안은 1245년 견자산 북편 민가에서

                실화로 인하여 연경궁 기타 법왕사 어고(御庫) 태상부(太常府)등 건물과 민가 800여호를 소실하였으며 1270 

                년 (원종11년) 개성 환도직후에는 몽고군이 저항군 삼별초 잔당을 소탕한다고 도성에 불질러 많은

                건물을 태웠고 또 1637년(인조15년) 병자호란에 대부분 소실되었다.

                다음에 또 조선조의 궁전을 세웠으나  병인양요로 인하여 조선조때 건물 행궁 및 장령전등을 소실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세월따라 세우며 태우고 무너지는 사건이 반복되어 왔다.


 

 그림으로보는 고려궁지

 


 

 내가면 황청리 계룡돈대
인천광역시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된 계룡돈대, 돈대는 오늘날의 초소와 같은 곳이다.
      계룡돈대는 강화 54돈대 중 유일하게 '1679년(숙종 5년)에 설치된것' 이라는 축조연대가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관리를 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