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정족산사고 옛사진입니다.
Exif information loading...
정족산사고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내부의 전등사(傳燈寺) 서쪽에 있었으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일이 중심 업무였다. 강화도에 사고가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1595년(선조 28)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춘추관(春秋館)과 충주(忠州) ·성주(星州)의 사고가 불타고 유일하게 남은 전주(全州)사고의 실록이 해주(海州)를 거쳐 강화부 관아 건물에 보관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것은 다시 영변의 보현사(普賢寺)와 객사(客舍)을 거쳐 1603년 새로 설치된 강화도 마리산(摩利山)사고에 옮겨졌다.
정족산사고는 1653년(효종 4) 마리산사고에 화재가 일어남으로써 건립이 추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효종대 이후로 강화도가 국가의 위기에 대처할 기지로 적극 개발되었으므로 그 곳에 사고를 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1660년(현종 1) 정족산성이 완성되고 실록을 성 내의 사고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관례대로 장사각(藏史閣)과 함께 선원각(璿源閣)이 세워졌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고로 실록이 옮겨진 것은 1678년(숙종 4)이었다. 이후 실록이 새로 만들어지는 대로 1부씩 보관하였고 그 밖에 왕실 족보나 의궤(儀軌)를 비롯한 여러 정부문서를 함께 보관하였다. 춘추관에 소속되어 그 곳에서 관장하였으나 현지의 관리는 수호사찰인 전등사에서 맡았다.
정조대에 강화부 관아 위쪽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이 설치되어 국왕의 초상화나 친필 외에 많은 서책이 보관되었지만, 이 사고는 그것과 별개로 계속 운영되었으며 외규장각과 달리 병인양요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10년 이후 보관 서적들은 규장각도서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모여져 함께 관리되었고 지금의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로 이어졌다.
사진의 건물은 1930년경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장사각>과 <선원보각>의 현판만 전등사 대조루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몇해 전에 건물이 복원되어 현판도 새 건물에 다시 걸었다.
Exif information loading...
Exif information loading...
복원된 정족산사고 장사각
<출처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강화도 歷史 文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재연(魚在淵 1823~1871) 장군, '2010년 5월의 호국인물'에 선정 (0) | 2011.05.23 |
---|---|
강화부 조선궁전도(행궁 외규장각 장녕전 만녕전) (0) | 2011.05.23 |
강화産 조선 태조의 명마 '사자황(獅子黃)' (0) | 2011.05.23 |
강화도의 백제토기 (0) | 2011.05.23 |
강화도령 철종의 초상화 (0) | 2011.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