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산성'이 정말 山城인가?
□개요
강화산성 시리즈1편에서는 강화산성의 잘못된 족보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이번에는 이 성의 이름 문제를 거론하고자 한다. 언급했듯이 강화산성은 1710년에 축성된 강화유수부성(江華留守府城)을 가리킨다. 이 정식 명칭을 나두고 왜 강화산성이라고 부를까? 조선시대 4대사서에도 나오지 않는, 근거 불명확한 강화산성이라는 이름이 도대체 언제부터 사용되어 온 것일까? 강화산성이 山城일 수 없는 이유를 말하기 위해 우선 산성의 개념부터 살펴 보기로 한다.
□우리나라의 산성은?
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라고 할 만큼 고대로 부터 많은 산성을 축조하여 국토를 방어해 왔다. 산성은 험준한 산지의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성곽으로 산봉우리를 둘러싸는 테뫼식과 계곡을 포함시켜 쌓는 포곡식(包谷式)이 있다.
일단 전쟁이 나서 적군이 몰려오면 인근의 모든 民.官.軍이 무기와 식량 등을 싸들고 거주지를 떠나서 산성으로 들어가 숨거나 농성(籠城)하면서 항전하게 되는데 이와같은 入保전술은 淸野전술과 함께 적은 병력과 자원으로 넓은 땅을 방어하는데 아주 효과적이었기에 산성은 고래로 우리나라 방어전술의 핵심이었다.
서애 유성룡의 산성론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옛적에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려고 할 때,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모두 "고구려는 산을 의지하여 성을 쌓았기 때문에 쉽사리 함락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하며 글안이 고려를 치려 할 때도 신하들이 간하기를 "고려 사람은 산성에 새처럼 깃듭니다. 대군이 가서 공격하다가 성공을 거두지 못할 뿐 아니라 자칫하면 제대로 돌아오지도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한다. 이것을 봐도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국토를 방어하는데 산성을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하였고 적들이 이 산성을 두려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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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 고구려의 오녀산성, 한강변의 아차산성, 한양도성의 입보처(入保處)인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권율장군이 대첩을 이룬 행주산성, 청주의 상당산성, 단양의 온달산성 등이 있고 김포에는 문수산성이, 강화 온수리에는 정족산성이 있다. 조선시대만 해도 전국에 759개소의 성곽이 있었는데 이 중에 182곳이 山城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산성은 산에다 쌓는 성인 것이다. 오녀산성은 오녀산에, 아차산성은 아차산에, 북한산성은 북한산에, 문수산성은 문수산에, 정족산성은 정족산에 있다. 그러면 강화산성은 강화山에 있을까?
□그럼 강화산성은?
성자락의 일부가 북산이나 남산, 견자산을 지나가기 때문에 산성(山城)이라고 했을까? 물론 산성은 입지,형태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입보처(入保處)'라는 기능이 강조되는 것이 우리나라 산성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어쨌든 산성이 되기 위한 제1의 요건은 산에다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과 들을 지나는 강화산성을 굳이 형태적으로 분류한다면 평산성(平山城)이 되겠고 한양도성이 이런 범주에 들 것이다. 강화산성은 형태나 기능상으로 산성이 될수 없는 성이다. 명칭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할 지 모르지만 역사복원에 있어서, 명칭이나 용어부터 정확한 복원이 이루워져야 그 복원되는 실체의 성격과 의미가 명확히 규정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자주 쓰는 성곽의 종류와 기능, 사례를 한번 살펴보자.
● 도성(都城) :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 江都中城, 평양성, 신라 금성, 조선 한양성.
● 궁성(宮城) : 궁궐과 관청 건물들을 둘러싼 성. 江都內城 ,평양 안학궁성, 경주 반월성.
● 장성(長城) : 국경,변방의 외적을 막기 위해서 쌓은 성. 江都外城,고려시대 천리장성
● 읍성(邑城) : 읍치(邑治)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 동래읍성,해미읍성,고창읍성,낙안읍성
● 나성(羅城) : 도성(都城)에서 궁성의 둘레에 있는 일반주거지를 크게 쌓은 성. 개성나성.
□강화산성의 정식명칭
자 그렇다면 산성은 분명히 아닌 사적 제132호 강화산성은 위에 열거한 성곽 종류 중에 어디에 해당할까? 읍치(邑治)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이 읍성(邑城)이라면 부치(府治)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은 부성(府城)이 될 것이다. 강화의 경우는 조선8도에 네군데 밖에 없는, 읍(邑)보다 격이 한참 높은 유수부(留守府)였기 때문에 유수부성(留守府城)이 되는 것이다. 강화산성이 아니라 강화유수부성(江華留守府城)이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강화유수부를 강화府로, 강화유수부성을 강화府城으로 줄여서 지칭한 관행과 조선시대 강화지도에 府城으로 표기한 전례에 따라 강화부성(江華府城)을 정식 명칭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수정일 : 2009:01:08 23:2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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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과제
-개명 신청 : 애초에 사적 제132호로 지정될 당시(1964년) 실무자의 신고서 작성에서부터 단추가 잘못 꿰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 근거에 의해 50년 가까이 잘못된 山城 이름표를 당연한 듯 달고 있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관련 기관에서는 문화재청과 협의하여 하루빨리 개명작업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관광 콘텐츠 개발 및 홍보 : 강화부성을 강화산성이라는 애매모호한 이름으로 바꾼 데에는 고려시대의 城으로 견강부회하기 위한 1964년 당시 관계자들의 원모심려(遠謀深慮) 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드는데 사실이라면 부질없는 遠謨요 악수가 된 深慮일 뿐이다. 우리나라에 흔해 빠진 山城이나 邑城보다 희소가치가 있고 왕권과 관련이 깊은 강화府城이 관광 콘텐츠 개발이라는 측면에서도 훨씬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엉터리 스토리를 담고있는 안내판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역사왜곡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일회성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한번 거짓으로 꾸며지기 시작한 역사 서술은, 그 거짓의 속성 때문에 끊임없는 허구의 반복으로 점철되게 마련이다. 山城이란 이름표를 달고 고려시대의 성으로 왜곡된 채 50년여 년을 보낸 강화산성, 두 세대가 넘어가기 전에 빨리 강화부성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출처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작성 : 느티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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