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지키는 데 도움 준 탱자나무
추억이 주렁주렁 달린 탱자나무
고향집 탱자나무 울타리에는 어린 시절 추억이 아직도 주렁주렁 달려 있다. 고향집은 마음산(馬飮山) 자락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짐승이 침범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다. 빽빽한 탱자나무 울타리는 고양이도 넘을 수 없다. 넘다가는 가시에 찔려 3주간 입원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형제들은 한가위 때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곧은 놈을 하나 골라 윷을 만들곤 했다. 탱자나무는 아주 단단하기 때문에 윷에 적격이다. 톱으로 나무를 자르면 가운데 물관세포가 드러난다. 숫돌에 간 시퍼런 낫으로 매끈하게 다듬으면 아주 멋진 윷이 된다.
어린 탱자나무의 잎
한가위 때 윷놀이를 즐긴 후 송편 한 입 물고 하늘을 보면 고개를 훨씬 많이 들어야 한다. 어느새 하늘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하늘 쳐다보는 것을 즐긴다. 가을 하늘에 걸린 바람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마음으로는 비단 같은 구름에 앉아 한때를 즐기는 바람을 얼마든지 찍을 수 있지만, 내가 가진 카메라로는 아직 감당할 수 없다. 언젠가 좋은 카메라를 구입해서 그런 장면을 찍고 싶다. 추석 때 마당에서 하늘을 쳐다보면 탱자나무의 열매가 눈꼬리에 걸린다. 노란 열매와 파란 하늘이 잘 어울리는 부부 같다. 저녁에 탱자나무 열매와 보름달을 쳐다보면 마치 탱자 열매가 눈동자와 같다.
탱자나무는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 꽃잎도 장미과 나무처럼 다섯이다.
요즘은 탱자나무 열매를 따서 소쿠리에 담아 방향제로 많이 사용하지만, 내가 어릴 적에는 열매를 먹곤 했다. 식물도감에는 열매를 먹을 수 없다고 적고 있지만, 먹을 것이 부족했던 탓에 나는 먹었다. 그 덕분에 나는 열매 속을 안다. 열매는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한 신맛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두 개 정도 먹고 나면 더 이상 먹을 수 없다. 늦가을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는 언덕 이곳저곳을 방황하다 일부는 새나 짐승의 먹이로 사라지고, 일부는 검은색으로 변해 운 좋은 놈은 새 생명으로 태어난다. 이듬해 언덕 근처 밭에는 아주 작은 탱자나무가 방긋 웃으면서 나를 반긴다.
빽빽한 탱자나무 울타리는 고양이도 넘을 수 없다.
겨울철에는 간혹 탱자나무가 위험에 처한다. 나처럼 어린 시절 특별한 놀잇감 없이 자란 이들에게 칼싸움용으로 잘려나가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교 시절까지 달 밝은 겨울밤에 친구들과 보리밭에서 칼싸움을 즐겼다. 이때 탱자나무는 칼로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배꼽 정도로 잘라 만든 탱자나무 칼은 잘 부러지지 않아 승리의 요인이었다. 보리밭에서 칼싸움하던 그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집 앞 논에는 이제 보리도 심지 않을 뿐 아니라 눈도 그만큼 내리지 않는다. 세월이 많이 변했다. 그러나 탱자나무에 걸린 추억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봄날, 탱자나무 꽃에 취하다
운향과의 탱자나무는 워낙 열매가 인기인지라 꽃은 뒷전이다. 탱자의 이름도 열매를 강조한 것이다. 우리말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자’가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열매를 강조한 것이다. 중국 한방에서 열매를 일컫는 한자는 두 가지이다. 덜 익은 푸른색 열매는 지실(枳實)이고, 잘 익은 열매는 지각(枳殼)이다. 그러나 『보필담(補筆談)』에 따르면, 중국 육조(六朝: 오(吳)·동진(東晋)·송(宋)·제(齊)·양(梁)·진(陳)) 이전에는 지실만 있었고 지각은 없었다. 아울러 지실은 탱자나무 중 작은 것을, 지각은 탱자나무 중 큰 것을 일컬었다. 중국의 식물도감에는 지실과 지각을 각각 다른 항목에서 다루고 있다.
갈잎 키 작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삼은 것은 이 나무의 가시 때문이다. 탱자나무로 만든 울타리를 지리(枳籬)와 지번(枳藩)라 부른다. 그런데 탱자나무 학명(Poncirus trifoliata Rafinesque)을 붙인 미국의 라피네스쿼시(Rafinesquesch, 1783~1840)는 잎을 강조하고 있다. 학명 중 ‘트리폴리아타(trifoliata)’는 ‘잎이 세 개’라는 뜻이다. 탱자나무 잎은 가운데가 길고 그 주위에 두 개의 잎이 달려 있다. 영어권에서도 탱자나무를 잎이 셋 달린 오렌지를 의미하는 ‘트리폴리에이지 오렌지(Trifoliage Orange)’라 부른다. 학명 중 ‘폰키루스(Poncirus)’는 귤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퐁키레(poncire)’에서 유래했다.
열매를 보려면 꽃을 먼저 봐야 하지만, 봄철에는 워낙 화려한 꽃들이 많아서인지 탱자나무 꽃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요즘 곳곳에 탱자나무를 조경수로 즐겨 심기 때문에 마음만 있으면 탱자나무 꽃을 얼마든지 만끽할 수 있다. 탱자나무도 매화, 개나리 등처럼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 꽃잎도 장미과 나무처럼 다섯이다. 한 장씩 한 장씩 피어 있는 순백의 꽃에서 풍기는 향기는 매화 못지않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구암산 입구 탱자나무 울타리에 꽃이 피면 향기에 취해 산에 들어가기 어렵다. 중국 당나라 시인 온정균(溫庭筠, 812~872)도 탱자나무의 꽃을 잊지 못했나보다.
상산조행(商山早行)
새벽에 일찍 일어나 말방울 울리며 드디어 출발할 때(晨起動征驛)
나그네인 나는 고향 생각에 슬프기만 하네(客行悲故鄕)
닭소리 들리고 지는 달 초가지붕에 걸려 있고(鷄聲茅店月)
판자다리 위에 서리 내려 발자취 나 있다(人跡板橋霜)
떡갈나무 잎 떨어진 산길을 걸어가노라면(葉落山路)
탱자 꽃이 주막집 담장을 배경으로 희고 밝게 피고 있다(枳花明驛牆)
하염없는 꿈인 듯 고향 장안 근처의 경치 눈에 어리고(因思杜陵夢)
지금쯤 철새들 연못 근방에 잔뜩 떼 지어 있으리라(鳧滿回塘)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천연기념물 제78호)를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를 쳐놨다.
이건창과 탱자나무
강화도는 애환의 역사현장이다. 고려시대에는 몽골항쟁의 근거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병인양요(丙寅洋擾)·신미양요(辛未洋擾)의 격전지였다. 그래서 강화도는 고적답사의 필수 코스다. 나도 이러저런 이유로 강화도를 여러 번 찾았다. 그 중에서도 최근 두 차례 명미당(明美堂)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의 유적지를 찾았던 기억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나는 주덕회(周德會) 회원들과 매주 한 차례씩 한문 공부를 하면서 4년에 걸쳐 명미당전집을 읽었다. 작년에 회원 중 한 분이 명미당전집 중 글을 골라 책을 출판했다. 우리는 책을 출판하기 전 사장 및 이건창 후손과 함께 이건창 유적지를 찾았다. 그런데 그 동안 수많은 유적지를 답사했지만, 이건창 유적 답사만큼 참담한 기분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이건창은 ‘철저하게’ 버려진 존재다. 그의 묘소는 안내판조차 없어 찾는 데만 한참 걸렸으며, 비석조차 없었다. 강위(姜瑋, 1820~1884)에게서 배운 그는 김택영(金澤榮, 1850~1927), 황현(黃玹, 1855~1910)과 가까웠다. 15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우리나라 과거 사상 최연소 등과의 기록을 가진 분이었다. 아울러 그는 1875년 충청도 암행어사로서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을 비롯해 관리들의 비리를 엄하게 조사하고 민폐를 해결하여 조선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분이다. 그러나 그는 곧은 심성 때문에 권력자의 미움을 받아 많은 시간을 유배생활로 보내야만 했다.
주덕회 회원들은 책을 출간한 후 다시 이건창의 묘소를 찾아 ‘마지막 문장’을 바쳤다. 그는 조선의 마지막 문장가였다. 그는 김택영이 뽑은 고려와 조선의 10문장가 중 한 사람이지만 내가 읽은 글 중 가장 뛰어난 글을 쓴 문장가였다. 그날 우리는 이건창의 후손과 만나 저녁을 같이 했다. 그 후손은 눈물을 흘렸다. 그분의 눈물은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이 찾아와서 자신의 조상에 관심을 가져 준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이 아니라 못난 후손 탓에 조상을 현창하지 못한 울분이었던 것이다. 얼마 전 우리의 노력 덕분인지 강화군에서 이건창 묘역 조성에 예산을 책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주덕회 회원의 꿈은 그분의 전집을 번역·출간하는 것이지만, 강화군에서 뒤늦게나마 그분에 관심을 가져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강화도 사기리 탱자나무 가지가 휘어 지주목으로 받치고 있다.
나는 강화도를 떠올리면 이건창과 생가의 탱자나무를 기억한다. 이곳 강화도 사기리 탱자나무(천연기념물 제79호)는 이건창 생가 앞 길가에 살고 있다. 강화도에는 이곳 외에 갑곶리의 탱자나무(천연기념물 제78호)도 있다. 갑곶리 탱자나무는 강화도 역사박물관 옆에 살고 있다. 특히 강화도의 탱자나무는 이 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다. 나이 약 400살 정도의 두 그루 천연기념물은 아주 귀하고 의미 있는 나무다. 탱자나무 중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가 흔치 않은데다 외적을 막았던 나무이기 때문이다. 정묘호란(1627년) 때 난을 피해 이곳에 온 인조(재위 1623~1649)는 외적을 막는 수단으로 강화도에 성을 쌓고, 성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어서 외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 같은 사례는 『대동야승(大東野乘)』 제19권 권별(權鼈)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남방의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은 집 둘레에 탱자나무를 심어 울타리로 삼아 도적을 방비했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이건창 생가의 탱자나무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목발’ 없이는 지탱하기 어렵지만, 이건창의 굳센 정신을 닮아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도로변과 인접한 탓에 매연에 시달리는 게 애처롭지만, 강화 앞바다의 파도소리를 노래삼아 지낸다면 그럭저럭 견딜 만할 것이다. 간혹 이건창 선생이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나눴던 얘기를 기억하다보면 차 소리도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강화도 사기리 탱자나무(천연기념물 제79호)
강화도 사기리 탱자나무는 이건창 선생의 유적지를 찾았다가 우연히 만났다. 나무를 찾아가서 우연히 유적지를 만날 때도 있지만, 유적지를 찾았다가 우연히 나무를 만날 때면 흥분은 곱절이다. 그래서 이곳의 탱자나무는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이곳 탱자나무는 해가 바다에 잠길 무렵 서서히 몸매를 감추고, 차 소리가 잦아드는 밤에 지난날의 아픈 역사를 되새길 것이다. 간혹 침략자들의 야만에 치를 떨 것이고,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고통을 잊고 지내는 후손들의 태도에 실망의 한숨도 쉴 것이다. 그러나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듯, 때가 이르면 후손 중에서도 조상의 삶에 감명 받아 심기일전하는 자, 역사와 함께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탱자나무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글·사진 / 강판권(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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