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강화도의 역사

강화도농부 2011. 6. 27. 23:32

강화군의 연혁

상고시대 갑비고차
서기 475  고구려 장수왕시 혈구군으로 개칭
서기 757  신라 경덕왕시 해구군으로 개칭
서기 844  신라 문성왕시 혈구진 설치
서기 940  고려 태조 강화현으로 개칭
서기 1232  고려 고종 강화군으로 승격
서기 1363  고려 공민왕 강화부로 승격
서기 1394  조선 태조 강화도호부 설치
서기 1627  조선 인조 강화유수부로 승격
서기 1895  조선 고종 강화군으로 개칭
서기 1896  조선 고종 강화부로 승격
서기 1906  강화군으로 개칭
서기 1914  교동군을 강화군에 편입
서기 1962  볼음출장소 설치
서기 1973  강화면을 강화읍으로 승격
서기 1995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

 

 

 

 

 

역사적 위치

 

1995년 3월 1일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된 강화도는 선사시대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반도의 역사를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 하겠다. 우선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으로 하점면 장정리와 화도면 사기리·동막리 등지에서 구석기유물이 수습되었으며, 신석기유물도 도(島) 내의 여러 곳에서 수습되었다. 또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거석(巨石)유적인 지석묘[고인돌]가 하점면 부근리를 비롯한 도처에서 다수(약 80기 이상으로 추정) 발견되고 있어, 이 지역에서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보여준다.

 

특히,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는 마니산 참성단과 그의 세 아들로 하여금 쌓게 하였다는 정족산 삼랑성(일명 정족산성)에 관한 전설, 그리고 하음봉씨 시조의 천강 설화와 관련한 봉천대 및 봉가지·봉은사·석조여래입상(일명 하음노구석상) 등의 유적은 강화도가 성지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강화도가 역사의 주요 무대로 기록되는 시기는 고려 후기이다. 몽골군과의 항쟁을 위해 개성에서 이곳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강도시대 江都時代 : 1232 ~1270년] 흔적을 볼 수 있는 고려궁터 및 성곽 등이 있어 북방유목민족의 침입에 따른 최적의 피난처로 강화도가 가능하였음을 본다. 특히 세계적인 보물로 인정(1998년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일명 제조대장경 : 1236~1251년간에 걸쳐 완성)의 제작이 이루어진 것도 바로 대몽항쟁시의 강도시대에서였다.

 

피난처로서의 강화도의 중요성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계속 이어지게 되는데, 1627년(仁祖 5)의 정묘호란과 1636년(仁祖 14)의 병자호란 등 두 차례에 걸친 만주족의 침입에 맞서 강화도로 잠시 피난하였던 것이다. 이는 강화도 전체가 천연의 요새로 이루어졌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강화도는 수도(한성) 방위의 전초기지라는 역할에 걸맞게 수많은 군사시설(성곽·진·보·돈대·포대·봉수 등)을 축조·설치하여 방비를 강화하게 된다.

 

조선 말기에 들어와 수차례에 걸쳐 강화도가 서양세력 및 일본의 침략에 맞선 격전의 장소가 되었음은 강화도가 수도방위의 전초기지로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지녔음을 여실히 나타내 주고 있다 하겠다. 쇄국정책을 표방한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빚어진 프랑스함대의 침략사건인 병인양요(1866년), 미국의 통상요구가 발단이 되었던 신미양요(1871년), 그리고 개항을 요구하기 위한 구실로 강화도 앞바다에 출현한 일본 선박과의 충돌사건인 운양호사건(1875년) 등이 그러하다. 운양호사건에 대한 배상으로 일본과 체결한 병자수호조약(1876년)이 맺어진 곳도 바로 강화도에서였다.(따라서 이 수호조약을 일명 강화도조약이라고도 한다). 이는 우리나라가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강화의 옛 이름 “갑비고차”의 유래

 

강화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甲比古次)’였다.‘갑비’는 고유어 ‘갑’을, 고차는 ‘곶, 곶이’를 표기한 것이다. 이러한 명칭은 현재 강화읍 소속의 갑곶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면 갑곶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갑은 돌 위에 돌을 올려놓은 것을 ‘갑석(甲石)’, 두 배를 ‘갑절’, 겹창을 ‘갑창(甲窓)‘이라 하는 것처럼 둘(2)의 뜻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한강 하류의 조강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지점이 강화의 동북단에서 둘로 갈라져 강화의 북단과 강화·김포 사이의 염하로 나뉘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이해된다.

 

’고차‘는 ’고즈, 고지‘로 변하여 곶이 된다. 곶(串)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해온 한자음으로 강, 바다로 돌출한 지역이나, 내륙에서 벌판을 향해 길게 뻗어나간 지형에서 온 지명형태소 이다. 즉 갑비고차란 현대어로는 ’갑곶, 갑곶이‘가 되며, 두 갈래로 갈라진 물(바다, 강)가에 있는 곶으로 된 고을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후대에 불려지는 혈구, 해구, 강화라는 지명은 둘로 갈라진다는 뜻이 사라지고 물과 관련되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